과거를 조사한다 10

Mameloukor | 조회 수 39 | 2020.07.31. 18:16

 잠결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니 섬뜩함에 몸이 떨렸다. 필시 콘파쿠 요우키이리라. 언성이 높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목소리,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이 사람을 떨게 했다.
 그런 목소리를 들으니 잠이 확 달아났다.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 웬 꼬마 아이가 앉아있었다. 이상한 초록 모자를 쓴 고양이 귀 달린 소녀. 눈이 마주치자 꼬마는 살짝 놀란 얼굴이 되더니 바깥으로 나가며 외쳤다.

 “란 님! 유카리 님! 깨어났어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몸을 찌르는 듯 갑작스러운 고통에 다시 드러누웠다. 그래, 요우키에게 아주 비참하게 두들겨 맞고 베이고 찔렸었지. 살아있다는 게 놀라운 수준이다. 나는 굳이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염마였다. 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자 염마가 살짝 미소지었다.


 “안 죽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순간적으로 그녀가 사토리 요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나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대충 정신을 차리고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지끈거렸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뒤에서 분홍머리 귀신이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했다. 그녀가 호호 웃었다.

 “여긴 백옥루야.”

 그녀가 문을 더 옆으로 밀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넓은 백옥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놀라는 와중에 유유코가 말했다.

 “그때 일은 사과할게. 내가 너무, 음, 과격했었나봐.”
 “과격했지요. 멀쩡한 사람 앞에 나타나 목숨을 위협한 것이 과격하지 않으면 무엇이 과격이겠습니까.”

 염마가 쏘아붙이자 유유코는 유구무언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때 염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직 콘파쿠 요우무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쉬고 계십시오.”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슴팍에 손을 대자 염마가 말했다.

 “연초는 몸에 안 좋으니 두고 왔습니다.”

 그 비싼 연초를 버려두고 오다니, 아무리 염마라지만 정말이지 너무하다. 이 의뢰를 시작하고는 하루에 연초 한 개비도 제대로 못 피운 것 같다. 보수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면 일단 연초부터 잔뜩 쌓아놓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붕대에 쌓여 마치 모 공포 소설에 나오는 미라 같았다. 요우키의 무지막지한 칼질에도, 몸이 너절해졌다만 어쨌든 살기는 했구나. 목숨을 위협받고 팔이 꺾이고 온몸이 칼에 베이고 찔렸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아란 쿠오타메인도 샤로쿠 호무즈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다. 굳이 달성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그때 뒤에서 유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살짝 웃어보이고는 유유코와 염마에게 말했다.

 “요우무가 깨어났어. 이제 준비하면 될 거 같아.”

 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녀와 유카리가 뒤돌아 방을 나섰지만 유유코는 홀로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며 기다렸다. 유유코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이라도 의뢰를 그만두면 안 되느냐는 말이겠지.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고생을 해놓고는 이제 와서 그만둔다니, 아무리 내가 머저리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유코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누기 어려운 몸을 최대한 끌고 일어섰다.
 사람들을 따라 안채로 들어섰다. 눈을 감은 채로 정좌하고는 아무런 말도 없는 콘파쿠 요우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옆에는 야쿠모 유카리가, 또 옆에는 란과 아까 그 고양이 소녀가, 반대쪽에는 사신이, 그녀의 옆에는 예상치도 못하게 아큐와 케이네가 앉아있었다. 내 모습을 본 아큐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차와 간식이 준비된 자리를 염마가 가리켰다. 나는 순순히 자리에 앉아 요우무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올 때까지의 침묵은 정말이지 생경하고 기묘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앉아있는데 그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이 없으니, 그 기묘한 침묵 속에서 마치 침묵조차 죽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기나긴 정적을 깬 것은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머리와 목덜미,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콘파쿠 요우무였다. 그녀는 유유코와 다른 이들에게 공손히 인사하고는 내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이제 괜찮니, 요우무?”
 “괜찮습니다, 유유코 님.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유유코가 웃으며 염마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홀로 일어서있던 염마가 입을 열었다.

 “콘파쿠 요우키.”

 요우키는 눈을 뜨고는 염마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약속한 대로, 이 두 사람에게 17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겠습니다.”

 그녀는 정파리거울을 꺼내들었다.

 “본디 이 거울은 죄인에게만 써야 하는 물건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녀의 양손에서 거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거울은 나와 요우무 사이의 허공으로 날아오더니 이내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요우키는 미동도 없이 거울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거울이 가로로 눕더니, 허공에 요우키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유유코, 유카리, 아큐를 닮은 보라색 머리의 여인, 텐구, 갓파, 오니, 그리고 파란 눈의 한 남자.
 쪽빛처럼 푸른 눈의 한 남자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바깥에서 온 잡지에 그려졌던 바깥세계 군인의 얼룩무늬 복장과 USMC라는 익숙한 단어,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단검. 그 사람은 분명 나를 닮았으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요우무가 나와 거울 위의 사람을 번갈아가며 돌아보았다. 그녀도 놀란 눈치였다. 분명, 분명 내 아버지리라.
 아버지는 시선의 주인, 즉 요우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고개를 같이 돌리자 그곳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요우키를 닮았지만 요우키가 아닌 남자, 그리고 요우무가 항상 머리에 쓰고 다니는 검은 머리띠를 쓴 하얀 머리의 여자. 요우키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고 요우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 둘이 분명 요우무의 부모가 틀림없을 터.

 ‘아버님.’

 하얀 머리의 남자, 요우키의 아들이 요우키에게 말했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어색하게도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케이네가 말했다.

 “역사가 지워지면서 저들의 이름도 사라져버렸어. 그래서 요우키 님의 기억 속에서도 이름이 사라져버린 거야. 모두가 잊기로 약속했으니까.”

 케이네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큐가 그런 케이네의 팔을 붙들며 그녀를 위로했다. 우리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흐르고 흐르며 아버지의 팔에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물이 갑자기 흐르기 시작했다. 참을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소리를 안 내려고 노력했다. 질질 짠다고 아버지가 돌아올까? 그럴 일은 없다.
 시간이 또 흘러 이번에는 술자리였다. 요우키의 아들과 내 아버지가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둘이 친한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요우키의 아들은 내 아버지에게 바깥세계에 대해서 물었다. 아버지는 어눌한 일본어로나마 친구에게 대답했다.

 ‘여기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지. 밤에도 낮처럼 밝고, 사람이 하루 온 종일 돌아다니고, 나처럼 이곳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사람들도 있고……. 솔직히 그리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
 ‘거 한 번 가보고 싶네. 아버님께선 어떠십니까?’

 두 아비가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에 두 자식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습다고 해야 할지 참담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의 모습을 본 염마는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연민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말했다.

 “잠깐 쉬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친근한 모습을 보면,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그 후를 생각하면, 중간에 어떤 참극이 벌어졌다는 것은 뻔했으니까.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유유코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나, 후회가 들었다. 내가 잠깐 쉬자고 말하려는 찰나에, 요우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요.”

 요우무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굳건한 표정이었다.

 “계속 보여주세요.”

 그녀의 강단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제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진실은 알려져야만 한다. 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거울 속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르고 흐른 시간 끝에, 거울 속은 천둥번개가 치는 밤이 되었다. 내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되어 그때 그 무연총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번개가 내리치자 주변이 밝아졌다. 요우키의 아들과 며느리, 유카리, 텐구와 오니, 그리고 이 시선의 주인인 요우키까지. 어색한 침묵에 이어서 요우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결계를 부수고 환상향의 질서를 무너트리려고 하였다! 사람들을 혹세무민하여 바깥으로 이끌고, 이곳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네놈이 저지른 악행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리라!’

 아버지는 허리띠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사방을 둘러싼 환상향의 요괴들, 그리고 그렇게나 친했던 친구가 자기에게 칼을 겨눈 절망적인 모습에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무어라고 외쳤다.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이름을 불렀으리라.

 ‘걱정 마! 자네를 미워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원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잖아!’

 요우키의 아들의 손에서 점점 칼이 내려왔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네가 이뤄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인데, 내 아들을 잘 부탁해!’

 요우키의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번개가 쳤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자기 목에 단검을 박았다. 자기 목을 스스로 찢어버리자 주변에 있던 수많은 요괴들도 모두 움찔했다. 아버지는 목에서 피를 쏟으며, 끔찍한 소리를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나는 더 이상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었다. 입에서 괴로움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아무리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아버지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는 장면을 똑똑히 보는 것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솟아오르려는 구역질을 힘겹게 넘기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요우키를 제외하고, 다들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문지르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계속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그 어떤 진실도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고통스럽지 않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이켰다. 따듯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요우키의 아들은 내 아버지의 몸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마자 시체는 카샤에게 바로 넘겨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며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요우키의 아들도 그러했다. 그는 유카리와 자기 아버지를 한 번씩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이 낙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벌일만한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울 속의 유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여긴 우리 요괴들의 마지막 피난처야. 이곳을 무너트리려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돼.’
 ‘저나 제 아버님이 결계를 부수려고 해도 말입니까?’

 유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키의 아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유카리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죽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기억은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이유로 죽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냐고! 그러면서 이런 곳을 낙원이라고 부른다고? 이 뻔뻔한 년아!’

 그의 아내와 요우키가 그에게 달려들어 막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칼부림이 벌어졌을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완력에 유카리가 비틀거렸지만 그녀의 표정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요우키는 유카리와 자기 아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유카리.’

 요우키는 유카리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유카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틈새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요우키의 아들이 소리쳤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벌여야합니까, 아버님! 우리가 언제부터 망나니짓이나 하게 되었습니까?’
 ‘유카리 님 말이 맞다. 여긴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다. 이곳마저 무너진다면 우리의 운명도 그날 끝나게 될 거다.’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아버님. 더는 못하겠다고요.’

 요우키의 아들은 떨리는 손으로 친구의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요우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이내 며느리에게 아들을 데려가라고 말했다.
 다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시간이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니, 요우무의 어머니의 배가 커져 있었다. 아마도 임신한 모양이다. 요우키의 아들은 그러나 기쁜 얼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요우키의 아들은 이미 유유코와 유카리는 물론 아버지인 요우키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요우키가 굳이 며느리에게 아들에 대해 묻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러하리라. 요우무의 어머니는 반쯤은 체념한, 또 반쯤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아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지금의 요우키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부드러운 말투였다. 며느리는 그러나 말이 없었다. 요우키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유카리 님이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아느냐? 누군가가 요괴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다닌다고 하더구나. 게다가 바깥세계로 나가려는 음모까지 꾸민다던데.’

 그 말에 반사적으로 그녀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요우키의 아들은 홀로 창밖을 보며 유유자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싱긋 웃었다. 요우키는 손가락을 튕겨 다시 며느리의 시선을 자기로 끌어왔다.

 ‘만약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당장 말해다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막을 수만 있다면…….’
 ‘아버님께서는 운명을 믿으십니까?’

 며느리의 말에 요우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요우키의 두 손을 맞잡았다.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세상에 인간이 득세한 것도, 요괴가 그 세를 다하고, 밀리고 또 밀린 끝에 이곳에 터를 잡은 것도, 그리고 결계를 쳐서 막은 것도 필시 운명이겠지요.’
 ‘운명…….’
 ‘만약에 파멸이 저희를 덮친다면, 그것도 필시 운명일 거예요. 저는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 제 운명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요우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며느리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키가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에 떠는 며느리의 손을 요우키는 더 강하게 붙잡았다. 운명. 요우키가 홀로 읊조렸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내 아버지가 죽을 때처럼,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었다. 요우키는 급하게 하쿠레이 신사 경내로 달려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방이 피로 가득했다. 번개가 내리치며 안이 밝아졌다. 가슴에 칼자국이 난 하쿠레이의 무녀가, 레이무 이전의 무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유카리가 손에 피를 흘리며 앉아있었다. 요우키가 유카리를 부르며 다가갔다.

 ‘요우키…….’

 유카리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는 요우키를 올려다보았다.

 ‘누, 누가 이런 짓을?’
 ‘당신 아들이에요.’

 유카리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 아들이 무녀를 살해하고 나를 상처 입혔어요.’
 ‘내 아들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카리는 요우키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막으러 가야 해요. 그 아이가 지금 무연총에서 결계를 부수려고 한다고요.’
 ‘결계를 부순다니, 그게 무슨…….’
 ‘결계가 무너진다면 환상향도 무너지게 되겠죠. 요우키, 그때 그 파란 눈의 외래인이 했던 말을 기억해요?’

 내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리라.

 ‘당신 아들은 그 남자의 옛 동료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려고 해요. 환상향을, 불태우려고 한다고요!’

 요우키의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리라. 자기 아들이 환상향의 결계를 부수고 무너트리려고 한다는 말에 그 어떤 아비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유카리는 그러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요우키의 팔을 붙들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환상향은 지켜져야만 해요, 요우키. 모두가 목숨을 바쳐서 세운, 우리들만의 낙원이잖아요!’
 ‘그럼 나보고 내 아들을 죽이기라도 하라는 거요?’
 ‘당신 아들은 이미 많은 요괴를 살해하고 무녀도 죽였지요. 그건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아무리 당신 아들이라도……! 환상향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의무를 다하세요, 요우키!’

 요우키는 바닥에 나동그라지듯 주저앉았다. 충격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울 바깥의, 지금의 요우키를 보았다. 그는 이미 고개를 떨어트린 채였다. 유카리도, 유유코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거울 속을 똑바로 보는 이는, 염마와 나, 그리고 요우무 뿐인 모양이었다. 요우무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고 있는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보았다가, 이내 다시 굳게 마음을 다잡은 듯 거울을 보았다.
 요우키는 어느새 아들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코마치와 처음 맞닥뜨렸던, 그리고 내 아버지가 죽은 그 무연총 언덕 위였다. 아들은 누관검을 얼굴에 바투 붙이고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둘은 서로 칼을 맞대었다. 한 합, 두 합, 세 합……. 칼과 칼이 맞붙고, 피를 이어받은 부자가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허나 수번은 더 아들의 목을 칠 기회를 가졌음에도, 요우키는 공격을 잇지 못했다. 오히려 아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쌓여갔다. 요우키도 아들도 힘겹게 다음 공격을 이어가는 장면에, 거울 바깥의 요우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환상향을 지키겠다는 의무와, 아들이 말했던 분노 사이에서 나는 갈등했었소.”

 요우키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거울 속에서는 부자가 싸우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손으로 입가를, 눈가를 문질렀다.

 “그 갈등 끝에 결국, 나는 환상향을 지키기로 선택했소이다.”

 그 말과 동시에 요우키는 일격에 아들의 팔을 잘라버렸다. 아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 꿇었다. 비참하게 쓰러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요우무가 입을 가렸다. 거울 속 요우키는 울먹이며 비통하게 아들에게 외쳤다.

 ‘왜, 어째서냐!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냐! 어째서!’

 그런 과거의 모습을 보며, 지금의 요우키가 말했다.

 “난 아들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가 없소.”
 ‘가짜 낙원의 개가 되어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요우키는 자기 칼을 높게 쳐들었다. 아들은 고통에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마지막, 소원이야. 내 딸, 막 태어났을 거야……. 아직 이름도 못 지었는데…….’

 요우키는 그대로 아들의 목을 내려쳤다.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몸뚱어리도 마찬가지였다. 요우키는 그대로 칼을 떨어트리고는 그대로 무릎 꿇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그의 손에 고인 아들의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눈물로 가득한 요우무의 두 눈이 점점 커져갔다. 그녀가 조부를 돌아보니, 요우키는 거울 속 모습처럼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우키는 천천히 그 양손을 쥐었다.
 거울 속의 요우키는 허름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요우키의 며느리가 힘겹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마른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요우키가 그 옆에 무릎 꿇고 앉자,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여보?’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옆에 앉은 사람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아, 아버님……. 그럼 그이는 결국…….’

 요우키는 떨리는 손으로 손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요우키에게 말했다.

 ‘아직 아이 이름도 못 정했는데…….’
 ‘네 이름을 따서 요우무라고 지으마.’
 ‘요우무……. 좋은, 이름이네요…….’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요우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로를 발로 차서 남아있던 불씨를 흩어냈다. 어떤 희한한 마력 때문인지 갑자기 불이 확 일어나더니, 이름도 없는 요우무의 어머니의 시신은 허름한 집과 함께 불에 집어삼켜졌다. 요우키는 요우무를 품에 꼭 안고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하지만 거울은 여전히 빛을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고, 이번에는 유카리가 요우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잔뜩 겁이 난 얼굴로 요우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우키의 섬뜩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더 이상 의무를 다하지 않겠소.’
 ‘요우키…….’
 ‘환상향을 위해 나는 내 아들의 목까지 직접 베었소이다. 그런데 당신은 무얼 하고 있소? 달라진 게 있긴 하오?’
 ‘당신 손녀를 생각……. 흐윽!’

 요우키는 유카리의 멱살을 잡았다.

 ‘내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당신이더군.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런 일까지 벌어지도록 유도한 게 당신이라고 하더이다. 그런데 이제는 요우무를 걸고넘어지는군.’
 ‘그건, 사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소. 난 이제 네년한테 정나미가 떨어졌으니까. 네년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이 낙원이 이제 어찌 되든 간에 상관하지 않겠소. 그때 아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요우키! 제발!’
 ‘이제 끝일세. 영원히.’

 요우키는 그대로 유카리를 내던지듯 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뒤돌아버렸다. 뒤에서 들리는 유카리의 말에도 불구하고, 요우키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거울이 빛을 잃더니 다시 염마에게로 되돌아갔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옆을 돌아보니 요우무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린 채로 펑펑 눈물을 쏟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는 말없이 내 품에 안겨서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염마가 거울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의뢰는 끝났습니다. 당신,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코마치를 보았다.

 “코마치, 세 분을 마을로 모시고 가십시오.”
 “셋이요? 아, 아아. 알겠습니다, 시키 님.”

 아큐와 케이네 선생이 일어서자 나 역시도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울먹이는 요우무를 두고 간다는 것은 무언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수는 없어보였다. 나는 요우무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사신에게 안내 받아 명계를 나가는 동안, 우리 넷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sad 2020.08.01. 01:58

다음편대기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