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환상들이 - 003

lunawhisle | 조회 수 84 | 2016.06.08. 02:36

"끄응..."


뒤통수가 굉장히 아프다... 머리도 어질거리고,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팔도 굉장히 땡겨온다. 대체, 뭐가 어떻게...


-절그럭!


"엥?!"


내가 팔을 움직임과 동시에 들려오는 쇠사슬 소리 때문에 깜짝 놀라, 정신이 확 든다. 주위를 둘러보니, 명백하게 감옥으로 보이는 장소에 나는 갇혀있었다. 손에는 벽에 연결된 수갑이 채워져 있다. 이런거에 손이 묶인채로 정신을 잃어 있었으니, 팔이 땡기는건 아주 당연했던거다.


근데, 왜 나는 일어나자마자 이런곳에 있는거지? 아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분명, 옷이 찢어져서 옷 갈아입을 곳을 찾아보다가... 어라, 그 이후의 기억이 끊겨 있네.


그나저나, 이 감옥... 마치 중세시대 서양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나올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걸 보아하니, 일단은 아직 홍마관인 모양이다. 환상향에 있는 서양식 저택이라고 해봐야 몇 곳 없고, 지하에 감옥이 있을법한 곳은 내가 알기론 홍마관정도 밖에 없으니 확실할거다.


"...쓰러지기 전에 옷은 갈아 입었던 모양이네."


몸을 내려다보니,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핫팬츠를 입은 내 복장이 벽에 걸린 램프의 불빛에 어렴풋이 비춰보였다. 이 근처에 앨리스가 준 옷 가방이 없는걸 보아, 나를 여기에 가둘때 일단 같이 가져와주진 않은 모양이다. 하긴, 당연한건가. 호텔 종업원도 아닐테고.


참고로, 이게 내 최선이다. 앨리스가 준 옷들은 분명 예쁘고 세련됐지만, 정말 여자여자스러운 녀석들 천지였기때문에... 최대한 중성적인 밸런스를 세운게 이거라구?


...하긴, 핫팬츠를 입은 남자애따윈 본적 없다만. 시이나군이면 모를까. 네가 시이나군이니?


하여간, 뭐가 어찌됐던간에 여기서 나갈 필요가 있어보이는군.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늦게 돌아가면 케이네가 걱정한다. 오늘 저녁은 케이네 마망이 맛있는거 해준다고 했다구.


잠깐, 나 방금 마망이라고 했니?


-또각...또각...


"!"


내 사고를 끊어내듯, 들려오는 구둣소리. 소리가 들려오는 빈도나 그 소리의 크기를 감안해 보았을때, 대충 마리사보다 살짝 작은 키의 여자아이가 여기에 오고 있는것일터. 즉, 나랑 비슷한 키의 소녀다. 굳이 이를 밝힐 필요는 없었다는걸 방금 떠올리긴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 저택에 사는것, 그것은...


"헤~ 사쿠야가 잡아온 침입자라는게 이거구나?"


호기심 가득한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창살 너머의 나를 내려다본것은, 여러맛이 날것같은 수정들이 달린 날개를 가진 소녀였다. 램프에 비춰보이는데도 알아볼 수 있는 저 창백함, 그리고 나이트캡을 쓴 금발 트윈테일. 금발적안이라니, 정말 판에 박은듯한...흡혈귀다.


그렇다. 이 저택에 살고 있는것은 흡혈귀. 뱀파이어. 어디 사는 로리콘의 말을 빌리자면, 다 파고 난 광산같은 존재. 그만큼 많이 일컬어진, 강력한 요괴.


"있지, 네가 우리 집 문지기를 담벼락에다가 쳐박고 온 걔야?"


"...그거 말하는건가?"


그러고보니, 여기 들어오기전에 졸고 있는 문지기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두들겨 맞을뻔 한걸, 의문의 힘을 발휘해 철산고로 날려버렸었지. 와, 이렇게 나열해놓고 보니까 진짜 무슨 중2병 소설 주인공 같네... 이거 나중에 신체 일부분에 이능이 깃들어서 봉인해야하는거 아냐?


"우리 문지기가 일은 안해도, 꽤 강할텐데. 그정도면 나랑도 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와봤지."


"...공교롭게도 놀려고 해도 이렇게 갇혀 있는 몸인지라. 꼬맹이, 이름은?"


"웃, 꼬맹이라니. 너한테 듣고 싶지 않은걸."


물론 그러시겠죠... 납득합니다.


하지만 다소 자극은 됐는지, 흡혈귀 소녀는 엇흠 하고 기침을 하더니 우아하게 옷자락을 들어올리며 예의바르게 인사한다. 치마가 다소 짧았던 탓에 안에 입고 있던 드로워즈가 슬쩍 보였다. 색기고 뭐고 하나도 없는 아가씨로군. 하긴, 쟤한테 성욕을 느낀다면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하는게 좋아보인다만.


"내 이름은 플랑도르 스칼렛. 이 저택에 살고 있는 흡혈귀야."


"이거이거 예의 바르게... 묶여 있는지라 이쪽은 예의를 차릴 수가 없다만, 나는 우이하루. 어... 이 집에 있다는 마법사를 찾고 있어."


"파체 이야기 하는거야? 뭐야, 재미없게... 난 또 흡혈귀 사냥꾼인줄 알았잖아. 그럼 좀 더 재밌게 놀 수 있었을텐데."


"...굉장히 심심한가보구나."


흡혈귀가 흡혈귀 사냥꾼을 반길 준비가 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징조가 아닌데 말이지...


"아, 그럼 풀어줄테니까 나랑 놀아줄래?"


"어...글쎄. 솔직히 여기 있는게 너랑 노는거 보다 더 안전해보이는데..."


쟤 아까부터 '논다'라는 말을 할때마다 눈에 광기가 서린다구. 솔직히 말해서 존나 쫄린다.


"에이, 그러지 말구!"


-챙!!


소녀...플랑도르가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는 시늉을 하자, 내 손을 묶고 있던 수갑과 쇠사슬이 박살났다. 어떻게 한건진 모르지만, 솔직히 집에서 밥을 같이 먹던 케이네 마망이 갑자기 일 생겼다고 날아가는 광경을 본 이후로 뭐가 일어나도 놀라지 않겠다고 결심한지라 그닥 놀라진 않았다. 좀 오싹하긴 했다만.


...가만, 나 또 방금 케이네를 마망이라고 한거야? 세상에.


"띠용..."


"이제 움직일 수 있지? 자, 어서 나와! 빨리 놀자!"


"어...음...Ah, What the hell."


저렇게 맨손으로 창살을 구부려주며 나오라고 재촉을 하시는데, 제가 안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내가 저 창살이나 쇠사슬 꼴이 날게 뻔한데 뭐. 방금 처음 본 사이긴 하지만, 저 여자애...지금까지의 회화를 미루어보아 정신연령이 생김새랑 그대로 일치하는 캐릭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 놀이의 종류에 대해선 다소 불안하지만, 적당히 놀아주면 흥미를 잃어서 어딘가 가버릴지도 모르지.


"뭐하고 놀건데?"


"으응...글쎄? 일단 우이하루가 망가지기 전에 용무부터 끝내는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데."


"...제가 망가지는게 전젭니까."


이쯤되면 솔직히 좀 지릴거 같다. 이 플랑도르란 여자애는 이때까지 인축무해한 웨어백택이나 고ㅈ...아니, 반인반요 점장이랑 놀던 나로썬 감당하기 좀 빡센 프레셔를 가진 요괴다. 무슨 카이지에 나오는 철골 건너기를 하는 기분인걸.


"어쩔 수 없잖아? 다들 약한걸."


"으음."


그나저나,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강한 요괴라는건 물론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 힘에 대해 저렇게 자신을 가지다니. 정신연령이 낮은데서 비롯된 자신감일까, 아니면...


뭐, 내가 이렇게 생각해봐야 별로 소용은 없겠지. 일단은 저쪽에서 내 볼일을 마칠때까지 유예를, 거기에다가 도움까지 줄 모양이다. 일단은 이 빅 웨이브에 탑승할 수 밖에 없다구.


"플랑도르, 그럼 그 파체라는 마법사한테 안내해 줄 수 있어?"


"물론~ 일단은 여기서 나가자. 사쿠야가 알면 잔소리할거야."


"그러지."


사쿠야가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러고 있던 말던 결국은 내 탈옥을 알게 될텐데... 가자고 하니 가야죠. 저한테 선택지는 없습니다. 흑흑.

 

 

 

 

 

 

 

 

 

 

 

 

 

 

 

 

 

 

 

 

 

 

 

 

라는 이유로 도착한 장소는, 놀라울 정도로 넓은 도서관이었다. 넓이도 넓이지만, 꽂혀 있는 장서의 숫자는 무슨 국립도서관급이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넓은거야? 바깥에서 본 넓이를 생각해보면, 이정도쯤되면 건물 전체의 1/2정도는 되어보이는데... 이만큼 크고 창문이 없는 방이 있다면 바깥에서도 티가 났을거다. 내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 말하자면, 절대 티가 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마법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될거 같은 예감이 드니 이쯤하고 더는 신경쓰지 않기로 하자.


"으음, 책냄새..."


"책냄새 싫어해?"


"아니, 싫진 않은데. 예전에 살던데 집앞이 고서점이었거든."


오히려 추억이 떠오르는 냄새라고 해도 좋을테지. 어릴적부터 맡아오던 냄새였으니.그나저나, 이렇게 넓은데 청소는 누가 하고 있으려나...?혹시 모종의 술식으로 자동으로 청소를 시킨다던지? 오, 이것 봐. 벌써 마법스러운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잖아? 내일부터 호그와트 다녀도 되겠군. 그리핀도르에 10점.


"흐응~ 나도 어릴적부터 맡던 냄새라 싫진 않아. 아니지, 파체가 우리집에 온게 언제쯤이었더라... 80년? 100년?"


요괴는 날짜를 세는 단위 수 부터가 다르구만. 하여간 까마득하게 옛날부터 같이 지내왔다는건가.


"거의 가족같은 느낌인 모양이네."


"글쎄? 사실 난 파체랑은 그렇게까진 친하지 않거든. 파체는 언니랑 친해."


...안 친했던거냐고.


"언니가 있었어?"


"응... 자, 재미 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고, 파체나 찾아볼까?"


"? 아, 그럼 나야 좋지."


어라라, 언니라는 화제가 나오자마자 바로 주제를 돌려버리네. 혹시 그 언니라는 사람...아니, 흡혈귀겠지. 하여간 걔랑 사이가 안좋기라도 한걸까.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일까, 아까보다 더 활기차게 걸어다니며 그 파체라는 마법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플랑도르. 나야 그 마법사가 어디 있는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므로 그냥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갈 뿐이다.


그나저나... 이런 대도서관 안에서 사는 마법사라. 이때까지 만나온 마법사들을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마법사와 가장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는 인물일거 같다. 솔직히, 앨리스는 (내가 생각하는)마법사라고 하기엔 너무 세련되었고, 마리사는...음...걔는 아뜰리에 시리즈에 나와야 해.


이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왠 이상한 변태노인이라도 나오면 그땐 아마 이성을 잃을지도 몰라. 딱히 내가 변태노인에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건 아니고, 살의에 불탈거라는 이야기. 그래, 마치 아까전에 그 문지기를 날려버렸던 것처럼...


"문지기...라."


아까의 그 감각, 지금 떠올려보면 정말로 이상했지... 머리에 스위치가 켜지는 감각이라고 할까. 나도 모르는 지식이랑 몸 동작을 마치 여태까지 쭉 알고 있었지만 그저 잊고 있었던것마냥 순식간에 내 것으로 만들어버렸지. 철산고 뿐만이 아니다. 지금 내 머리속엔 꽤 많은 수의 권법자세가 각인되어버린 상태다...그러고보면 아까전에 내 잡스의 유산에도, 무슨 권법2가 인스톨 됐느니 마느니 하는 메세지가 떴었지.


흠. 혹시 이게 앨리스가 말한 이 수정의 능력이 아닐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수정의 능력은 '내가 본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보는게 맞을까...?


"...그건 아니지."


"응?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냐."


나도 모르게 생각하던게 입밖으로 나와버렸군. 하여간, 아닌건 아니다. 그것도 그럴게, 난 케이네가 날아다니는걸 몇번이고 봐왔고, 마리사가 마법을 쓰는 모습도, 그리고 앨리스가 인형을 움직이는 것도 봐왔다. 그리고 내 고용주는 거의 패시브마냥 그 능력을 써재끼고 있고, 난 그걸 항상 봐왔다. 만일 내 능력이 '본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내가 봐 왔던 능력들을 모두 사용 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난 아직 날 줄 모르며, 마법은 커녕 린노스케의 능력 또한 사용하지 못한다. 애시당초에 오컬트 관련 물품을 제외한 향림당의 물건들은 대부분 내 지식으로 판별이 가능하니, 걔 능력이 굳이 필요한건 아니다만.


"우이하루...아니, 우이.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우이?"


갑자기 정박아 언니를 가진 천재 여동생같은 이름으로 불려지고 말았는뎁쇼.


"우이하루니까 우이. 너 이름 너무 길어서 부르기 힘들어."


"...너, 이름 플랑도르 아니었냐."


"응. 그래서 다들 플랑이라고 부르는데."


"...아, 그러셔."


"그래서 그래서?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아, 저 표정. 그거다. '나랑 같이 있는데 왜 그렇게 따분한 표정을 짓고 계시죠 산산조각 나고 싶으신가요' 라는 표정이다. 하기사,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랑 놀고 싶어서 감옥에서까지 꺼내 줬는데 이렇게 협조성이 없으면 좀 그렇긴 하겠군.


"별거 아냐. 파체라니 이상한 이름이네 하고 생각 했을 뿐."


"응? 파체는 파체 아닌걸? 정확히는 파츄리 널리지. 파체는 별명이야."


"...과연. 그래서, 그 파츄리는 어디에 있는거야?"


"그게 말이지, 원래라면 저어기~에 있어야 하거든?"


"응?"


플랑도르...아니, 플랑이 가르킨 곳의 끝에는, 넓은 책상과 그 주변과 위에 마치 산처럼 쌓인 책 더미가 있었다. 고3때의 책상이 떠오르는군. 그땐 가방에서 꺼내기도 귀찮아서 책상에 쌓아두고, 그 시간 수업이 되면 바로 책을 꺼내서 수업을 들었었지. 물론 좋은 베게도 되었고.


...어라? 주로 좋은 베게로만 쓰였던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이상하네. 분명 고3때는 공부 열심히 했던거 같은데...?


"어디 간거 아냐?"


"이상하네. 보통 파체는 이 시간엔 반드시 여기에 있던데...?"


고개를 갸웃하는 플랑. 그러더니 뭔갈 중얼중얼거리며 그 마법사가 있어야 할 자리로 걸어간다.


"...!"


그리고 그때. 오싹, 하고.


"흡!"


-태앵!


전방으로 두 스탭 밟고 후방을 향해 뒤올려차기. 거의 무의식중에 행한 행동이지만, 놀랍게도 나는 무언갈 걷어차올렸다. 저건... 나이프!? 어째서 저런게 내 등 뒤에 있었던겨?!


"...놀랐어. 완전히 사각에서 던졌을텐데."


그리고 들려오는, 차갑고 날이 선 목소리. 물론 목소리 자체는 미성이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감정은 그야말로 목에 들이밀어진 칼과 같다.


"안타깝게도, 내 몸이 두번은 당하고 싶어하질 않아하는거 같거든."


잘 생각해보면, 내 기억속엔 '내가 갇히게 된 과정' 중에서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실행자. 누가 나를 쓰러뜨려, 저 어두침침한 감옥에 가두었을까. 그 답이 내 눈 앞에 있다.


메이드. 푸른 눈을 가진 은발의 메이드가, 손가락 사이에 3자루의 나이프를 끼운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랑의 이야기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그 '사쿠야'라고 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보이는데... 벌써 탈옥한걸 눈치채고 여기까지 따라온걸까.


"이보셔, 그런걸 가지고 놀면 언젠가 사람 죽인다구?"


"나는 저택의 사용인. 침입자를 배제하는것도 내 업무중 하나지. 특히, 간만에 나타난 '룰을 지키지 않는 무법자' 라면 더욱이, 말이지."


"...룰?"


"환상향의 룰. 싸움을 놀이로써 승화하는 '스펠카드 배틀'. 아까전의 메이린의 상태를 보아하니, 넌 그 룰을 지키지 않았던 모양이던데."


눈을 가늘게 뜨며 이쪽을 노려보는 메이드.


"......저어기, 무슨 소리신지?"


나 처음 듣는데. 스펠카드 배틀인지 뭔지 하는거. 그나저나, 내 반응이 예상 외였는지, 메이드는 그 눈살을 찌푸린다.


"너, 혹시 바깥 세계의 인간?"


"아, 응. 우이하루라고 해.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넘어가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넘어와서 싸울 일이 한번도 없었거든. 그런 룰이 있는 줄 몰랐어."


"...하쿠레이 신사의 무녀한테 듣지 않았어? 룰에 대해서?"


"레이무 말하는겨? 만나보긴 했지만...아니, 못들었는데."


"...그 불량무녀..."


이마를 짚으며 탄식하는 메이드. 어라? 이거 용서해줄 분위긴가?


"하지만, 침입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적어도 죽이진 않을테니, 혼날 각오는 해."


아니었네요...


"앗, 사쿠야 너무해! 혼자 놀려고 하다니!"


"에, 작은 아씨?!"


"작은 아씨?"


어느새 푱 하고 튀어나온 플랑이 사쿠야를 가르키며 소리지른다. 그나저나 작은 아씨라니... 그러고보니, 얘는 여동생쪽이었지. 언니가 진짜 주인이라 플랑을 그렇게 부르는걸까.


"플랑이 꺼내줬거든. 꺼내줄테니 놀아줘~ 라고 하길래."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작은 아씨, 그럼 전 실례하겠습니다."


"아, 사쿠야. 파체 어딨어?"


"파츄리님 말씀이십니까? 파츄리님이라면..."


......가만, 뭔가 굉장히 불안하다. 아무리 주인의 여동생이 말했다고 해서, 저렇게 쉽사리 발을 빼려고 할까? 아니면 그만큼 플랑을 존중 해준다는걸까.


"......"


"어?"


순간, 사쿠야와 눈이 맞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비춰진 감정은...연민. 하지만, 그렇기에 아까의 차가움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 저 눈동자는 그거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동자. 리사리사 선생님이 떠오르는군. 쟤 50대 아냐?


...하여간, 플랑의 '놀이'에 관해서는 솔직히 각오는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저런 반응을 보니 역시 쫄리는군. 내 목숨은 오늘까진가.


"우이, 뭐하고 있어? 파체는 언니랑 같이 있대. 가자!"


"...그럴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지하에서 나오고, 바깥에서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넓이를 지닌 복도를 걷는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어느샌가 밤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에도 별이 보이지 않는건, 오늘 밤은 만월이기 때문이겠지. 환상향에서 보는 달은 바깥 세계에서 보던 달보다 훨씬 밝아보인다. 환상향에 흘러들어오는건 환상의 존재. 그 때문에 저 달도, 저렇게 환상적으로 보이는거겠지.


...는 개뿔. 저렇게 밝은건 당연히 공해가 없어서다. 여기 개 촌구석이니까.


"벌써 밤인가."


그러고보니 나 여기 왔을때가 낮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걸지도 모른다. 아직 겨울이라 해가 짧은것도 있겠지만.


"근데 있지, 우이. 왜 파체랑 만나려고 하는거야?"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가 몇분전에 붙여진 별명으로 불려져 고개를 돌려보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플랑도르 스칼렛, 즉 플랑이 있었다...뭐, 플랑을 따라가고 있었으니 있는게 당연하지만.


"그러고보니 이야기 안했던가. 마법을 배워보고 싶었을 뿐이야."


정확히는 원소마법. 앨리스가 해준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아까의 도서관을 다녀오고 나선 정말로 배우고 싶어졌다. 아까도 비슷한걸 말한 기분이 들지만 다시 한번 언급하자. 봐봐. 저렇게 본격적이고 매지컬한 도서관 본적 있어? 아, 물론 마리사도 마법사고 앨리스도 마법사지. 근데 이거 알아? 마리사네 집은 거의 쓰레기장이고 앨리스네 집엔 본인이 직접 조종하는 인형이 수십개나 떠다닌다구. 거기에 비해서 이 집 마법사는 진짜야. 내가 생각하던 그 마법사다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구.


뭐, 내 배우고 싶어하는 의지랑은 상관없이...어디까지나, 이 소녀가 말하는 '놀이'에서 살아남았을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만.


"우이, 나 있지. 거짓말하는 애는 정말 싫어."


잠시 생각하고 있자니, 앞서 걸어가던 플랑도르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응?아아...그건 나도 그래.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우이가 갑자기 조용해지니까, 혹시나 나랑 놀려는 약속 안지키고 도망칠려는거 아닌가해서. 전에도 그런 애가 있었거든."


"...음, 참고삼아 걔는 어떻게 됐어?"


"알고 싶어?"


"아니."


살짝 돌아보며 그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플랑도르. 명확하게, 그 눈에 담겨 있는 감정은 광기와 희열이었다. 그때의 기억이라도 되살리고 있는걸까. 도망칠 생각은 처음부터 안했지만, 더더욱 안하게 만들어주시는군요. 아주 감사합니다...


나 참. 솔직히 플래그를 잘못 세운게 아닌가 이제와서 후회가 된다. 이게 다 홍마관에 들어설때 첫단추를 잘못 끼운탓임에 틀림없다...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설마 자는거 깨우려고 했더니 죽일듯이 달려들 줄은 생각도 못했다구. 심지어 걔 낯짝은 계속 자는 얼굴이었다고. 정황상, 아무래도 몸이 멋대로 움직였던 모양인데... 요새 요괴들은 자동전투 기능이라도 달려있는건가. 요새 트렌드를 따르는구만. 게임산업은 대체 어디로 가려는건지.


아니, 내가 지금 이걸 생각하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애시당초 이제 그 게임산업 이라는 것들이랑은 완전히 연이 끊겼으니까. 게임산업이라고 할까, 대부분의 전뇌관련 기술이나 산업이랑은.


"나 있지, 사실 우이가 신기해서 같이 놀자고 하는거다?"


"이렇게 키 작고 여자같이 생긴 남자애는 확실히 신기해보이겠지."


"으응, 그거 말고. 근데 남자애였어? 헤~"


새삼 내게 관심이 가는지 거의 밀착하듯이 가까이 다가오는 플랑도르. 으음, 이렇게나 여자애가 가까이오다니 두근거리는군...은 개뿔, 나는 이런 꼬맹이한테는 별로 느낌도 없다. 느낌이 있다한다면 갑자기 내 모가지가 붕붕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정도?


"하, 하여간 신기하다는게 무슨 이야기야?"


"킁킁... 이상하네~ 언니는 남자애들은 위험한 냄새가 나니까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이한텐 그런 냄새 안나는데?"


"어느 시대의 성교육이냐 그건."


전대미문의 미개함이로군. 애시당초, 그렇게 냄새는 안날꺼라 생각하는데. 뭣보다 나이가 찬 여자랑 같이 살다보니까 좀 냄새에는 신경을 쓰게 되더라구.


...근데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케이네...정작 본인이 수화하면 좀 짐승 냄새난단 말이지. 가끔씩 향림당에서 탈취제를 뽀려와서 뿌릴 정도라니까. 고마워요 페○리즈!


"응...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내가 신기하다는거?"


"아, 그거다. 우이한텐 눈이 안보이거든. 그게 신기했어."


"눈?"


난 장님이 아닌데...아니, 우이'한텐'이니까 내게서 뭔가 보인다는 이야기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온다...인가 싶더니 멈췄다.


-삐릭!


"엥?"


저 멀리서 보이는 붉은 광점.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은 플랑도르를 밀어 넘어뜨리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머리 위를 지나가는 붉은 궤적. 동체시력이 굉장히 상승된 덕인지, 그 궤적의 정체를 나는 보았다.


그건, 붉은 광창(光槍). 맞으면 굉장히 아파보이는 투사체였다. 엄청 대충 표현한거 같지만, 어쩌겠는가. 진짜 아파보였는걸. 팔에 맞았으면 아마 팔째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뭐시여?"


"언니, 뭐하는거야~!!! 나도 있었다구~!!"


내 아래에 깔린채 버둥대며 소리치는 플랑도르. 그 몸짓은 그야말로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걸맞는 행동이었지만, 나보다 큰 사람이 내 밑에서 이렇게 버둥대니 굉장하게 거슬린다.


"플랑에게서 떨어져."


"에, 그런 캐릭?"


창문을 통해 비춰지는 달빛 아래로 걸어온것은, 회색 곱슬머리를 한 소녀. 전형적인 박쥐 날개를 지니고 있는 저 적안의 소녀는, 누가 봐도 '아 쟤 피좀 빨겠네'라고 생각할, 그런 직관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저게, 플랑도르의 언니...인가? 흠, 나보다 작은거 같은데.


"...레미는 네 존엄때문에 떨어지라고 하는거야. 인간."


그리고, 살짝 호흡기에 문제가 있어보이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미라고 불린 소녀의 옆에 선 그녀는, 초승달 장식이 달린 나이트캡을 쓰고, 보랏빛의 파자마같은 옷을 입은...어...쟤 얼굴 정말 이모티콘같이 생겼다...ㅡ△ㅡ 라는 느낌이야.


가만, 그러고보니 아까 그 메이드가 내가 찾는 마법사가 플랑도르의 언니랑 같이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저 여자애가 그 파츄린가 파슬린가 하는 애라는거군. 졸려보이네...


"응? 내 존엄이라니?"


"멋대로 들어와서 죽는건 상관없지만 나도 자비는 있어. 플랑한테 죽는건 굉장히 괴로울거거든. 그러니 그 아이에게서 떨어지도록 해."


"동생한테 말이 좀 심한거 같은뎁쇼."


거의 괴물취급이자녀. 아무리 그래도 좀 그런거 아닌가.


"...그 아이의 능력은 파괴. 거기에 조절이 잘 안되니까, 최악의 경우엔 가루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어."


...레알?


"우우, 파체까지! 우이 말이 맞아! 요새 나한테 좀 너무한거 아니야? 언니 미워! 파체도!"


"읏... 플랑, 나는 그런뜻이 아니라..."


"...적어도 난 그런 뜻이었는데."


"......"


그런데, 왜 나는 흡혈귀의 저택에 쳐들어와서 아래에 초 위험한 흡혈귀를 몸 아래에 깔아놓고 흡혈귀들과 마법사의 홈 드라마를 라이브로 시청하고 있는걸까. 굉장히 어색한걸.


"그리고, 우이한테는 눈이 안보였다구! 고장 안내고 잘 가지고 놀 수 있어!"


"에엥..."


심지어 백화점에서 파는 로봇 장난감같은 포지션이 된 상태잖아...?


하지만, 저 플랑의 말이 의외였는지 두 소녀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
"플랑의 능력이...통하지 않는다고?"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이상할정도로 방대한 마력이. 흥미로운걸. 레미, 저 아이... 아까 처분한다고 했지? 필요없으면 나한테 줘."


"...하아. 알아서 해. 너, 파체랑 이야기가 끝나면 나한테 올것. 플랑도. 알겠지?"


"앗, 언니 도망간다!"


"아니거든."


"......"


햫하! 혼란하다 혼란해! 시발 이젠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

 

 

 

 

 

 

 

 

 

 

 

 

 

 

 

 

 

 

 


"혼란하다,혼란해..."


현재 위치는 아까전의 그 도서관. 있는것은 나랑 파츄리. 그리고 그녀의 사역마...라고 하는 붉은 머리의 악마. 쟤 이름 뭘까. 굉장히 야하게 생겼는데. 


플랑도르는 내 눈앞에 있는 마법사님께서 '얘한테 볼일이 끝나면 줄테니까 조금만 빌려줘'라고 하면서 쫒아내버렸다.


어라? 근데 이러면 내 원래 목적은 달성된 셈인가? 이 저택의 마법사랑 만나러 온거잖아. 뭐, 거의 물건 취급 당하는 상태긴 하지만.


"......."


"...그렇게 지긋이 바라봐도 곤란한데. 클라링."


"...누가 클라링이야. 내 이름은 파츄리 널리지."


"왠지 그렇게 부르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우이하루. 플랑이 멋대로 우이라고 부르긴 하더라만."


"...그럼 나도 우이로 부를께. 이름이 길면...부를때 지ㅊ쿨럭쿨럭쿨럭!"


"띠용?"


거세게 기침하는 클라링...아니, 파츄리. 그나저나, 난 왜 얘를 클라링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을까. 잘 생각해보면 그 판도라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는 고양이귀 소녀랑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분위기려나?


근데, 기침을 저렇게 하다니... 아까전에 내가 생각한 '호흡기에 약간 문제가 있어보이는' 이라는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이군. 저 기침의 기세... 천식이려나?


하긴, 여긴 이래저래 쌓인 먼지가 많았으니까... 햇빛도 안들어오니 호흡기 질환이 안걸리는게 더 이상하겠군.


"...후우. 아까전에 플랑한테 들었어. 너, 나를 만나러 왔다고?"


"아, 맞아. 너한테 마법을 배워볼 수 있을까 해서."


"...제자는 모집하고 있지 않은데. 하지만..."


"하지만?"


한순간이나마, 그 가늘게 뜬 파츄리의 눈에서 이채가 감돈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 엄청난 마력량을 지니고 있어. 내 마법연구에 협력한다면, 생각해볼 수도 있지."


"마력량이라니... 음. 그러고보니."


앨리스의 말을 떠올려보자면, 이 수정은 계속해서 마력을 생성하는 태양로 이상의 에너지 소스라고 했던가? 혹은 아크 원자로 이상. 애시당초 내가 마법을 배우고 싶었던 이유중의 하나가, 이 넘치는 마력을 제어하기 위해서도 있었다. 대체 그 '마법연구'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조건이라면, 내가 마력 제어를 배우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부풀어 오른 풍선마냥 마력때문에 자폭하는 일은 없어질거라는건 명백해보인다.


"좋아. 대강 수지가 맞는 조건인거 같네. 앞으로 잘 부탁해, 파츄리."


"...제자가 된 이상, 마스터라고 부를 것."


"넹, 마스터."


이렇게, 나는 이 졸려 보이는 마녀의 제자가 되었다. 꽤나 간단했구만.


"...자, 그럼 결정됐으니 네가 묵을 곳을 정해야지. 사쿠야?"


"네, 파츄리님."


"헉, 어디서 들어온거야."


깜짝이야, 왠 살인 메이드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났다구. 대체 아까부터 생각한건데 어떻게 나타난거야? 그것도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이 아이, 오늘부터 내 제자로써 여기 살기로 했으니까 잘 곳을 마련해줘."


"알겠습니다. 아가씨껜 어떻게..."


"말 하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잠깐만, 나 여기서 살아야 하는거야?"


아니, 그렇게 '뭘 당연한걸 묻는거냐 바보 제자놈' 같은 표정을 지으셔도 곤란합니다만, 마스터 파츄리...


"...여기서 사는게 내가 가르치기 편하니까."


"에엥... 그럼, 적어도 오늘은 돌아가면 안될까? 같이 살던 사람한테는 말은 해놔야할거 아냐."


"아가씨께서 부르시는건 잊으셨습니까?"


"아, 그러고보니 그랬나... 근데 왜 경어?"


"파츄리님의 제자시니까요."


"...굉장히 싫어하는 표정을 짓고 계신거 같습니다만?"


"어머, 설마요."


그러니까, 부탁인데 그렇게 웃는 얼굴로 나이프를 만지작 대는건 그만 둬 줬으면 하는데... 아무리 첫 인상이 최악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하아. 알겠어. 일단 이 저택 주인부터 만날께. 그 다음엔 집에 돌아갔다 와도 되겠지?"


"그건 아가씨께서 판단할 일입니다."


"제 자유의지, 벌써부터 박탈된거 같은뎁쇼?"


"이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각오하셨어야 할 일입니다."


"무슨 홍콩행 게이바도 아니고..."


들어올땐 마음대로지만 나갈땐 아니라는거냐. 아니, 여기는 게이바라기 보단 레ㅈ...아, 나쁘지 않은데. 흡혈귀 + 백합이라. 좋지 좋아. 으음, 무라무라해지는군.


뭐, 하여간 저렇게 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구만. 문득 파츄리를 돌아보니, 갔다 오라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이더니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그래, 이게 내가 생각했던 마법사의 이미지라구. 실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여태까지 만난 '마법사'라는 양반들을 생각해보면 지극히 내 이상의 마법사다.


...뭣보다, 저 펑퍼짐한 옷에 가려서 잘 안보일 수도 있지만 거유고 말이지. 아주 채고야!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죠."


"아, 응."


이쪽엔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한 마스터 파츄리를 뒤로 하고, 나는 사쿠야를 따라 도서관을 나서 지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사쿠야, 라고 했던가? 아까전엔 이름을 제대로 물어보질 못했는데."


"그러고보니 아직 이름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실례했습니다."


"...적어도 이쪽 보고 이야기 해주지 않으실래요...?"


"제 이름은 이자요이 사쿠야. 이 저택의 메이드장을 맡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시하기냐고."


이런이런, 이라는 느낌이 장난 아니게 든다. 벌써부터 이렇게 미움 받아서야 앞으로 어떻게 산담. 하긴, 그것도 이 저택 주인한테 제대로 허락을 맡았을때의 이야기지만.


"플랑은? 아까 레밀리아...였나. 하여간 이 저택 주인이 같이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작은 아씨께선 아가씨께 화가 나신 모양이신지라...우이하루님만 데리고 가라는 작은 아씨의 명령이었습니다."


화?...아, 그러고보니 아까 광창을 냅다 던진것도 모잘라서, 동생을 괴물취급 했었던가. 화가 날만도 하지만... 언니라고 하는 사람(?)이 저정도로 말할 정도라면, 대체 플랑은 얼마나 강한 흡혈귀인건지. 아니, 강하다고 하기 보단 위험하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봐도 그녀의 정신상태는 불안정해보였으니까. 


"......"


"......"


그나저나, 이 침묵. 정말 참을 수가 없구만. 안그래도 복도가 쓸데 없이 넓어서 을씨년스러운데, 안내해주는 사람은 나한테 화가 났는지(사실 정확히 왜 화났는지도 모르지만) 말도 차갑게 하고...아니, 지금와선 아예 말도 없고 말이지. 그렇다고 이쪽에서 말을 꺼내려니 저 메이드가 뿜어내는 '말 시키지마 쉬벌' 오오라가 너무 강렬하고... 모르겠다. 일단은 조용히 따라가보도록 할까.


"아..."


이 어색함을 어떻게든 무마해보기 위해, 잡스의 유산을 꺼내 든다. 실은 딱히 꺼낼 생각은 없었지만, 정신차려보니 꺼내들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으음, 현대인의 습관이란 무섭구만. 이 폰 되찾은지 하루도 안지났는데 바로 꺼내다니.


그러고보면, 아까전에 봤던 그 묘한 메세지가 좀 신경 쓰였는데. '권법 2'였던가. 한번 실행시켜볼까...


"응?"


"무슨 일이신지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러십니까."


"......"


놀라울 정도로 흥미가 없어보이시는군. 뭐 그건 어쨋던, 이상하다. 분명 아까전에 '권법 2 가 인스톨 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를 봤을텐데, 정작 그 '권법 2'라는 어플리케이션이 보이질 않는다. 그 대신에, 깔았던 기억이 없는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어플이 떡하니 첫 화면에 놓여져 있었다. 혹시 이거려나?


"도착했습니다, 우이하루 님."


"앗, 응."


사쿠야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명백하게 이 집 주인이 살고 있을것 같은 화려한 문이 내 눈앞에 있었다. 화려하다고 할까, 좀 중2병 같은 문양이 한가득해서 좀 부담스럽다. 내가 조금만 어렸어도 '와 짱멋있다'라고 생각했겠지만...


하여간, 아까전의 그 어플은 나중에 확인해보도록 하고. 우선은 이 저택의 주인이랑 면담할 시간이다.


"아가씨, 우이하루를 데려 왔습니다."


[데리고 들어와.]


"실례 하겠습니다."


부담스러운 문이 열리고, 안에는 더 부담스러운 방...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상적인 방이 전개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에, 널찍한 침대. 관 같은 것도 있을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없었던 모양.하여간, 그야말로 이 저택의 주인이 사는 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그리고, 이 저택의 주인인 흡혈귀는 어째선지 잠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방에 들어온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저 박쥐날개... 잘때 불편할거 같은걸. 잘때는 수납하려나? 침대가 있는걸 보니 일단은 누워 자는거 같긴 한데.


"플랑은?"


"면목 없습니다, 아가씨. 작은 아씨께서는...오지 않으시겠다고."


"...아직 화내고 있는 모양이네. 알겠어. 사쿠야는 가봐."


"알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한뒤 방에서 나가는 사쿠야. 그냥 평범하게 나갈것이지, 나는 왜 째려보고 간데...?


"어디 앉는게 어때? 거기 의자 있는데."


"아, 땡큐."


멍하게 있자니, 보다 못한 저택의 주인...레밀리아가 내게 자리를 권한다. 그녀가 말한대로 의자를 들어 침대 앞에 놔두고, 그녀와 마주보듯 앉았다.


"우선은 그...뭐냐. 멋대로 침입해서 미안. 그리고 문지기 박살낸것도."


"딱히 사과 안해도 돼. 침입자는 언제나 있었고, 그 문지기는 한번 혼쭐 나봐야 했으니까."


"그, 그래?"


어라, 생각보다 즐거워보인다? 처음엔 좀 화나있는것 처럼 보이더니. 여자애들은 역시 잘 모르겠다니까.


"그리고, 너한텐 흥미도 생겼고 말야. 너, 이름은?"


"우이하루. 그러는 너는 레밀리아라고 했던가."


"레밀리아 스칼렛. 이름을 알고 있다는건, 흡혈귀라는 사실도 들었겠지?"


"으음, 그건 처음 봤을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겨놓고 이제와서 다른 요괴라고 하는건 예쁜 절벽가슴 여자애를 그려놓고 '사실 얘는 남자앱니다' 라고 하는 수준의 기만과 다름없는거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서 많아졌단 말이지, 이 패턴... 근데, 나도 저 축에 속하니까 뭐라 말을 못하겠다.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자랑하는건 아니다만.


"우이하루라...너무 길어. 우이라고 부를께. 아까 플랑도 그렇게 불렀구."


"...이 저택 사는 녀석들은 다들 별명 부르는걸 즐기는 모양이네."


사람 이름을 길다는 이유로 나도 갖고 싶은 천재 여동생 이름으로 바꾸다니... 딱히 싫지는 않다만.


"그나저나, 흥미라니? 내 입으로 말하는것도 뭐하지만, 나한테 흥미를 가질 건덕지는 내 성별 빼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성별?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내가 흥미를 가진건, 플랑이 네게서 '눈'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야."


"눈? 그러고보니 아까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거때문에 아까전에 레밀리아와 파츄리...그러니까, 마스터가 놀랐었지. 무슨 의미였던걸까.


"지금은 몰라도 되는 이야기. 파체랑은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제자가 되어달라고 했더니, 승낙하면서 여기서 살라고 하던데. 근데 아무래도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안그래도 물어보려고..."


"좋아. 상관 없어."


"...엥?"


"파체가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확실한 이용가치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나도 반대하지 않아. 안그래도, 부른 이유가 그거였어. 여기서 살지 않겠냐, 고."


물론 내 목적은 그게 아니었지만 말야. 라고 덧붙이며 레밀리아는 뭔가 뒤가 캥기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으음, 저건 아무리봐도 뭘 꾸미고 있는 웃음인데...하여간, 뭐가 어찌됐던 잘된 셈이다. 반대라도 하면 어쩌나 했으니까.


...그리고 사실, 슬슬 케이네의 집에서 나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말야. 본인은 상관없어하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나 자신이 신경 쓰인다. 딱히 뭐 남녀가 한지붕에서 사니 어쩌니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미안해서다. 아무것도 모른채 환상향에 흘러들어와버린 나를 거두어준게 그녀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케이네는 천사가 아닐까.


"뭐, 그렇게 됐으니 오늘부터 여기서 살도록 해. 방은 사쿠야가 마련해줄거야. 이 저택, 너도 봐서 알겠지만 방은 썩을만큼 많거든."


"그 대사, 무슨 미연시 남자 주인공 같은거 아니?"


"...뭐야? 미연시라는거."


"그런게 있어. 하여간... 일단은 오늘은 돌아갈께. 살던 집에 인사는 하고 와야할테니."


"좋으실대로. 그럼 나가봐."


"그래. 내일 봐, 레밀리아."


레밀리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방을 나선다. 자...그럼 돌아가자. 갑작스럽긴 하지만, 케이네한테 이 소식을 전해줘야...이삿짐이 없는게, 그나마 다행이로구만.

 

 

 

 

 

 

 

 

 

 

 

 

 

 

 

 

 

 

 

 

 

 

 

 

 

 

 

 

 

 

 

우이하루

 

주인공.

꾸욱 해도 퍼엉하지 않는다.

 

 

 

홍 메이린

 

홍마관의 문지기.

아직 벽에 박혀서 자고 있다.

 

 

이자요이 사쿠야

 

홍마관의 메이드장.

나이프를 마구 던져대는 크레이지 메이드. 주인공이 벌레보다 싫은듯하다.

 

 

파츄리 널리지

 

홍마관에 사는 마법사.

천식걸린 콩나물.

 

 

플랑도르 스칼렛

 

홍마관에 사는 흡혈귀. 레밀리아의 동생.

미친년인데다가 쌔다. 꾸욱하면 퍼엉한다.

 

 

레밀리아 스칼렛

 

홍마관의 주인, 흡혈귀.

제멋대로. 겉모습과 같은 정신연령. 동생보다 발육이 안좋다. 눈물.

 

 

 

 

야쿠모 첸

 

옵저버.

일터인데 직무유기.

  • |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